캐나다 벤쿠버의 다운타운 이스트 사이드 지역,
이 주변은 노숙자와 마약 중독자 그리고 매춘부들로 가득한 위험지역이다.
그러던 어느날 매춘부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약물중독으로 거리를 배회하던 여성들도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은 실종신고가 처음으로 접수된 지난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6월 22일 당시 23세의 매춘부 레베카가 벤쿠버 시내 동쪽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자취를 감추었다. 대개 사춘기에 가출해 마약에 중독되고, 약값을 벌기 위해 거리로 나선 이 지역 매춘부들은 이름을 바꾸거나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다반사여서, 사흘뒤 실종 신고가 접수 됐지만 매춘부에 대한 무관심으로 서류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84년 실종된 40대 초반의 매춘부 셰리 레일은 심지어 3년이 지나서야 실종 신고가 접수되었다.
이후 86년 일레인 아우얼바흐를 시작으로 잇달아 매춘부의 실종 신고가 접수되었다. 그러나 실종자 몇몇이 약물중독으로 사망했거나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벤쿠버 경찰은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당시 희생자의 가족에 따르면 경찰은 실종 여성들이 매춘부라는 이유로 크게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1992년 케이들린 웨이들리가 행방불명된 후, 벤쿠버 다운타운 동쪽에서 일어나던 의문의 실종사건은 3년여가량 중단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95년 3월 또 한명의 매춘 여성 실종자가 나타나면서 실종 행진은 다시 시작되었다.
특히 1997년 8월은 가장 끔찍한 달로 기록되었다. 한 달 사이 3명의 여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1년 이상 이 사건들을 모른채 지나갔다. 10명의 매춘부들이 더 증발한 1989년 비로소 실종 여성들에 대한 경찰의 공식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수사에 진척을 보이지 않자 결국 사건의 일부만 공개한 채 제보자들의 진술을 확보하며 수사망을 좁혀갔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1997년 로버트 픽튼이라는 돼지농장주인에게 칼에 찔린채 피를 흘리면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한 여성이 이웃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로버트 픽턴 (1949. 10. 24.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주 포트코퀴틀램)
신고를 받은 경찰은 픽튼을 살해미수로 체포했지만 검찰은 1998년 1월까지 사건에 대한 기소를 유예했으며 결국 사건은 기각되고 픽튼은 보석으로 석방되고 만다.
사건의 진범이 보석으로 석방된 사실을 까맣게 모른채 경찰은 수사를 강화시켰다.
미제 사건과 범죄자의 행동패턴을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인 지리학적 프로파일링(Geographic Profiling, 닥터 리드의 특기)의 창안자이며 매춘부들의 잇단 실종이 연쇄살인범의 소행이라고 판단한 킴 로스모는 일련의 실종사건에서 이상한 낌새를 찾아냈다.
그러나 경찰 상층부는 대중이 공포에 질릴까 우려해 연쇄살인범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사이 수사 인력은 85명으로 증강되었고 실종자의 가족으로부터 신상정보와 DNA분석 자료에 대한 수집작업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 차례 경찰의 의심을 받아 체포된 것이 스트레스 요인이 되었는지 이때부터 픽튼의 살인은 가속도가 붙게 된다.
벤쿠버 일간지 <벤쿠버선>에 따르면 1997년 부터 98년 사이 이스트사이드 인근에서 매춘부의 실종신고가 속속 접수되었다. 그러다가 1998년말 빌 히스콕스라는 제보자가 나타난다. 아내를 여의고 마약과 술에 쩔어 살던 히스콕스는 의붓누나의 도움으로 '써리'라는 지역의 한 식당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벤쿠버 외곽의 포트 코키틀람 지역의 한 돼지농장으로 월급을 받으러 다니곤 했는데 어느날 신문에 보도된 매춘부 실종 기사를 읽은뒤 이 농장의 주인 형제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들 형제가 농장 건물을 개조한 "돼지 궁전(piggy palace)"에서 매번 다른 매춘부를 데려다가 흥청망청 술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돼지농장의 주인은 다름아닌 1년전 보석으로 풀려난 로버트 픽튼이었다. 픽튼 형제의 이름은 경찰에도 낯설지 않았다. 동생인 데이빗은 1992년 성폭행죄로 벌금을 물고 가석방된 전력이 있었고 세차례 상해죄로 고소되기도 했다. 형인 로버트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1997년 살해미수죄로 체포되었지만 보석으로 석방했었던 것이다
픽튼의 돼지농장에 대한 수색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땅속에 묻혀 있던 돼지 뼈들과 함께 섞여 있는 실종된 여성들의 유골과 뼛조각들이 잇달아 발견되기 시작한다.
맨 처음 발견된 애벗스웨이와 윌슨의 신체일부를 증거로 드디어 2002년 2월 22일 픽튼은 체포되어 두명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1급살인의 형사책임을 지게 되었다.
경찰들은 실종된 여성들의 가족들의 DNA와 돼지농장에서 발견된 뼛조각들의 DNA를 서로 비교 대조하면서 추가적으로 실종 여성들의 시체를 발굴하기 시작한다.
캐나다 역사상 최악의 씨리얼 킬러 로버트 윌리엄 픽튼의 사건은 아직도 전모가 소상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심지어 피해자 여성의 수마저 불확실한 상황. 경찰은 픽튼의 돼지농장 어딘가에 매장되었을 피해자들의 사체 흔적과 유골을 발굴하기 위해 돼지농장 전체(약 1만 3612.5평)를 2미터 안팎의 깊이로 굴삭기를 동원해 샅샅히 파헤치고 흙속에 있는 뼛조각을 찾아내기 위해 파낸 흙을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지나가게 하면서 임시로 고용된 인류학전공 대학원생들로 하여금 육안으로 돼지의 뼈와 혼재된 실종자들의 뼈를 골라내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골라낸 수십만점의 뼛조각은 유전자 감식을 통해 1차적으로 사람의 뼈임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다시 2차적으로 정밀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이미 실종된 실종자 가족들의 유전자 정보와 대조함으로써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방법으로 시체발굴은 계속되었는데 2003년 11월까지 진행된 작업에 무려 7천만달러(약 600억원)이 소요됬다고 대규모 경찰 병력과 탐정, 인류학자 등 전문가들을 총 동원에 수색을 하였으며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경찰은 픽튼의 돼지농장에서 찾아낸 결과를 바탕으로 또 다른 지역에까지 수사영역을 확대했다.
이 수사에는 52명의 인류학자와 2명의 토양 전문가들까지 동원되었다고 하니 로버트 윌리엄 픽튼의 20여년에 걸친 살인 행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예다.
지난 20년간 벤쿠버 다운타운 동쪽지역에서 실종된 여성의 수는 현재까지 모두 63명을 헤아린다. 2002년 체포당시 로버트 픽튼은 "50명을 다 채우고 그만두려 했다"고 말했으며 "1명을 남겨두고 경찰에 잡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 픽튼의 돼지농장에서 DNA가 수거된 희생자 여성들은 31명이라고 한다.
2003년에 수색작업은 일단락되었으나 수색현장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증거물에 대한 분석작업때문에 아직도 범죄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재판은 8년간이나 진행되어오다가 바로 얼마전인 2010년 8월 '석방없는 종신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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